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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영웅 백선엽 장군의 업적과 논란

by 비기슈 2020. 7. 11.

2020년 7월 11일 백선엽 장군이 향년 100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1920년 11월 23일 평안남도 출신으로 육군 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교통부 장관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외교관이였습니다.

 

 


백선엽 장군의 업적

백선엽 장군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군에 입대하여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 개성을 관할하는 1사단장으로 부임하며 1951년까지 1사단을 지휘하였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그 날 오후 백선엽 장군은 1사단 병력과 김점곤 대령, 김익렬 대령이 이끄는 부대와 함께 개성과 문산지구로 출동하여 남하하고 있는 북한군에 맞섰습니다. 또한 6월 26일에는 경기도 장단군 고랑포에서 최경록 대령이 이끄는 연대와 함께 북괴군에 맞서 교전하였습니다.

 

그러다 6월 26일 화력과 장비의 부족으로 퇴각을 하게 되었지만 앞선 전투들의 공로를 인정받아 백선엽장군은 대령에서 준장으로 승급하였습니다.

 

한편, 낙동강까지 후퇴를 하게 된 백선엽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한국군 부대 중에서 유일하게 미국 1군단에 배속되어서 미군2개 연대와 함께 경북 칠곡의 다부동 전투를 치뤘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참 후퇴를 하여 전의를 상실한 국군 병사들이 무단이탈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백선엽 장군은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 (미군)이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며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같이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1사단은 미군과 함께 전투를 하여 미국 1기병 사단, 24보병 사단과 함께 평양을 점령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되었습니다.

 

백선엽 장군은 미국이 중국과 휴전협상을 시작했을 때 휴전협상 회담의 한국군 대표로 참석하였었고, 회담 도중 동부전선의 상황이 악화되어 다시 군단장으로서 강릉에 부임하였었습니다.

 

 


백선엽 장군을 둘러싼 논란

그러나 백선엽 장군의 6.25 업적과는 별개로 백선엽 장군을 둘러싼 논란이 있습니다.

백선엽 장군이 국군에 입대하여 복무하기 이전에 일제감정기 시절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였기 때문입니다.

 

 

간도특설대는 일본이 만주국 내에서 항일 운동을 하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대인데요, 여기서 백선엽 장군이 근무하면서 친일 행세를 했다는 것 입니다.

백선엽 장군 본인은 2009년 어느 한 언론의 인터뷰에서 "독립군은 구경도 해보지 못했는데 무슨 토벌을 하느냐"라며 자신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한 적은 없다는 주장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선엽 장군이 간도 토벌대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일본의 대대적인 만주에 대한 사전토벌로 한국인 독립군은 자유시 참변들으로 이미 소멸됐었거나 존립하더라도 팔로군 휘하의 공산군으로 편입되어 6.25 전쟁의 남침의 선봉대가 되었었기에 사실상 백선엽 장군에 의해 죽은 한국계 독립군 세력은 없었을 것 이라는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백선엽 장군 국립현충원 안장 관련 논란

백선엽 장군은 자신이 죽으면 대전현충원에 안장해달라고 말하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여려가지 분쟁들이 많은데요.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에 대한 공로를 인정한다면 당연히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 맞지만 그전에 일제를 위해 복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논란이 있는 것입니다.

 

 

친일행적을 한 것으로 추측되는 백선엽 장군을 현충원에 안장하면 안된다는 논쟁과 대한민국의 존립을 가능하게 한 백선엽 장군의 공로를 인정하여 현충원에 안장하여야 한다는 의견 이 두가지가 정치권에서도 서로 강하게 충돌하고 있어 향후 고 백선엽 장군의 안장문제가 어떻게 진행될지 관심있게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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